보도자료

과거의 염색공장, 30년 뒤 방광암으로 돌아왔다

  • 관리자
  • 작성일 : 2025.12.19
  • 조회수 : 29

화려한 옷의 색깔 뒤에 치명적인 독이 숨어있다.
1970~80년대, 섬유 산업의 호황을 이끌었던 염료 공장이 수십 년의 잠복기를 거쳐 ‘방광암’이라는 비극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 중심에는 과거에 무분별하게 사용됐던 1급 발암물질 ‘방향족 아민’이 있다.


1급 발암물질, 화려한 색 뒤에 숨은 독

과거 섬유·가죽·인쇄산업에서는 저렴한 비용으로 선명한 색을 낼 수 있는 아조(Azo) 염료가 널리 쓰였다.
문제는 이 염료가 합성과 분해 과정에서 인체에 치명적인 ‘방향족 아민’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특히 벤지딘(Benzidine), 베타-나프틸아민(β-Naphthylamine) 등은 국제암연구소(IARC)가 인체 발암성을 확인한 ‘1군 발암물질(Group 1)’이다.
이 물질들은 직업성 방광암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규제 없던 80년대, 무방비로 노출된 노동자들

1970~80년대 대한민국 산업화의 최전선이었던 염료·염색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이런 유해물질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원료를 섞고, 염색탱크를 관리하고, 제품을 건조하는 모든 과정에서 발암물질이 호흡기와 피부를 통해 체내로 흡수됐다.
당시에는 화학물질 안전 관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선진국에서는 사용이 금지된 유해 염료가 국내에 싼값에 유입됐다.

직업성 방광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지금도 부족한 편이다.
노동자 본인조차 자신의 병이 수십 년 전 일과 관련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산재로 인정된 한 사례가 이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준다.

경기도의 한 염료공장에서 1985년부터 1994년까지, 10년간 벤지딘 염료를 만들었던 노동자 ㄱ씨가 있었다.
퇴직 후 그는 전혀 다른 일을 하며, 과거의 작업 환경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렇게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22년 9월, 소변에서 피가 비치더니 통증이 시작됐다.
병원 검사 결과는 방광암. ㄱ씨는 결국 방광 전체를 들어내는 대수술(근치적 방광 절제술)을 받아야만 했다.

주목할 점은 ㄱ씨가 산재 신청을 결심한 계기다.
그는 치료 중 우연히 의사에게 과거 염료공장에서 일했던 사실을 털어놓았는데,
의사가 직업병을 의심하면서 비로소 과거 자신의 직업을 떠올렸다. 근로복지공단의 판단도 명확했다.
벤지딘은 방광암을 일으키는 것이 확실한 1급 발암물질이기 때문이다.
2000년 이전 염료 공장에서는 벤지딘을 취급했던 ㄱ씨의 방광암은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았다.


‘침묵의 잠복기’ 과거 직업 물어야 진짜 원인 보인다

현재 염료공장에서 발암물질 대부분은 사용이 금지됐다.
하지만 과거 수십 년 전 노출된 독성은 잠복기를 거쳐 이제야 암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사실은 폐암과 석면의 관계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아, 노동자 본인은 물론 일부 의료진조차 그 연관성을 놓치기 일쑤다.
의학적으로도 직업성 방광암과 일반 방광암은 증상이나 치료법에서 차이가 없어,
환자의 과거 직업력을 꼼꼼히 확인하지 않으면 원인을 밝혀내기 어렵다.

수십 년에 달하는 ‘침묵의 잠복기’는 이 연결고리를 더욱 쉽게 끊어버린다.
현재의 암 진단 앞에서 까마득한 과거의 노동 환경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방광암 진단 앞에서 ‘왜 하필 나에게?’라는 질문을 넘어,
‘혹시 수십 년 전 내가 일했던 그곳 때문에?’라는 질문을 반드시 던져야 한다.
과거를 향한 이런 질문이야말로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는 첫걸음이다.

노무법인 이산 암산재연구소장 (pdy869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