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벤젠 노출과 혈액암의 연결고리

  • 관리자
  • 작성일 : 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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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림프종·다발성골수종 같은 림프조혈기계 암은
모든 혈액세포의 근원이 되는 조혈모세포에서 비롯된다.
조혈모세포는 나무의 줄기처럼 여러 가지 가지로 뻗어나가
림프구·골수구 등 다양한 혈액세포로 분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혈액암은 이 분화 과정의 특정 단계에서 유전적 변이가 발생해 성장이 멈추고,
비정상적인 증식이 이어지면서 생긴다.

이 유전적 변이를 일으키는 대표적 물질이 바로 벤젠이다.
벤젠은 휘발성이 높아 호흡기나 피부를 통해 쉽게 흡수되며, 
체내로 들어온 벤젠은 조혈모세포의 DNA를 직접 손상시킨다.
쉽게 말하면, 벤젠은 ‘피 공장(골수)의 설계도’를 망가뜨려
정상 혈액세포 대신 ‘불량품(암세포)’을 계속 만들어내게 한다.

벤젠 노출은 석유화학 공장이나 타이어 등 고무 제조업, 플라스틱 제조업 같은 특정 산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기계 부품 세척에 쓰이는 솔벤트(유기용제), 도장 작업의 ‘페인트 희석제(시너)’, 신발·가구·전자제품 생산라인에서
대량으로 사용했던 접착제(본드)에도 벤젠이 포함된 사례가 많았다.
이처럼 벤젠은 산업 현장에서 세척제·용해제·원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해 왔다.


“법적 기준을 지켰다”는 주장이 공허한 이유

과거 벤젠 노출기준은 10ppm이었다.
이 기준은 벤젠의 발암성보다는 작업 중 어지러움 같은 급성 중독을 막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즉 ‘당장 쓰러지지 않을 수 있는 농도’였을 뿐,
수십 년 뒤 암을 유발할 수 있는 만성 독성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
벤젠에 노출된 노동자의 백혈병 발병률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역학조사 결과가 국내외에서 잇따라 보고됐다.
과학적 근거가 축적되자 2003년 노출기준은 1ppm으로 강화됐고,
2016년에는 0.5ppm으로 다시 낮춰졌다.
이 변화는 단순한 숫자의 조정이 아니다. 2003년 이전 ‘10ppm’ 기준을 지켰다 해도,
현재의 과학적 기준에서 보면 매우 위험한 작업환경이었음을 보여준다.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사건은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했다.
회사는 “벤젠을 원료로 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12년 정부 정밀 조사 결과, 벤젠은 공정 중 부산물로 생성되거나 다른 용제에 불순물로 포함돼 있었다.

법원 역시 이렇게 판단했다.

“1급 발암물질인 벤젠은 안전한 역치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기준치 이하의 저농도라도 장기간 노출되면 백혈병을 유발할 수 있다.”

이는 벤젠의 저농도 노출이더라도 산재 인정의 근거가 될 수 있음을 명확히 확인한 판결이다.


과거의 위험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벤젠 노출기준이 2003년 대폭 강화된 이후,
많은 사업장은 환기 설비를 개선하고 벤젠을 대체할 안전한 물질을 찾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벤젠 노출 수준이 과거보다 낮아지고 관리체계가 정비된 것은 분명한 변화다.

그러나 벤젠이 남긴 세포 손상은 수년, 때로는 10년·20년 이상의
긴 잠복기를 거쳐 암으로 발현되는 경우가 흔하다.
산업안전 전문가들은 “2025년 현재 발생하는 원인 미상의 혈액암 가운데
상당수는 과거 작업환경의 위험이 뒤늦게 드러난 결과일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현재의 작업환경이 개선됐다는 사실이 지금의 혈액암이 과거 업무와 무관하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과거 누적 위험이 질병으로 드러나는 시기일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벤젠의 저농도 노출 위험 또한 결코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수십 년 전의 ‘기준치 준수’가 오늘의 안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벤젠은 1급 발암물질이다. 역학·독성학·법원의 판단이 공통으로 말하는 결론은 단순하다.

“벤젠에 안전한 노출 수준은 없다.”

박도연 노무법인 이산 암산재연구소장 (pdy8691@hanmail.net)